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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세모글루와 존슨이 쓴 『권력과 진보』를 읽었다. 8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고, 프롤로그부터 본문은 그림 하나 없이 줄글로 600쪽에 육박한다… 이 요약 블로그 포스팅을 다시 보면 봤지 책을 다시 읽을 건 아닌 듯…

1장과 11장의 요약이 다른 장에 비해 긴데, 이유가 있다.

  • 1장에서 할 말을 대부분 다 한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만 얻고 싶다면 1장만 보면 된다.
  • 11장 내용을 독서모임에서 토론을 한다고 하는데, 내 최근의 기억력을 생각하면 다 잊을 거다. 그래서 기억 상기용으로 좀 더 길게 적음.

프롤로그

(파놉티콘을 제안한) 벤담의 사고는 오늘날 유행하는 견해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역량을 확장해주고 그것이 경제 전반에 적용되면 효율성과 생산성을 크게 증가시킨다. 그 다음에 사회는 조금 늦게든 빠르게든 그 이득을 분배할 방법을 알아낼 것이고, 이는 모두라고 말해도 될만큼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경험한 “공유된 번영”의 사례들은 기술진보 자체에 내재된 요인에 의해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던 결과가 아니었다. 공유된 번영은 기술 진보의 방향과 사회적으로 이득을 분배하는 방식이 협소한 지배층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제도적 배열에서 벗어났을 때만 생겨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포용적인 새 비전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회의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

1장.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

테크놀로지가 “공유된 번영”을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를 위해 세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Q1) 새로운 기계와 생산 기법이 언제 임금을 증가시키는가?
  • A1) 생산성 밴드웨건(생산성을 높여주는 새로운 기술이나 생산 방법이 임금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 논리에는 두 단계의 인과 관계가 필요하다. 첫째, 생산성이 증가하면 기업은 고용을 늘리고 (즉, 노동 수요를 늘려서) 생산을 확대해 수익을 높이려고 할 것이다. 둘째, 기업들이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을 자기 회사로 불러오고 이직을 막기 위해 주어야 할 만큼의 임금이 상승한다. 하지만 두 단계 모두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성 증가가 노동 수요를 반드시 늘리는 건 아니다. 특히 (그저 그런 자동화나 감시기술 발달을 위한) 자동화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을 약화시키면, 생산성 증가는 노동수요를 심지어 줄이기도 한다. 노동 수요가 증가해도 임금이 상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가 고용주와 맺고 있는 관계가 억압적인 경우가 있고, 명시적인 강압이 없더라도 다른 고용주와의 경쟁이 없어서 임금 상승 유인이 없을 수 있다. 또 임금이 종종 협상의 결과로 결정된다.

  • Q2) 더 나은 미래를 일구는 방향으로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 A2) 더 근본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새로운 기법과 기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 ‘방향’은 권력자의 비전과 궤를 같이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항상 옳은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 Q3) 테크 기업과들과 미래주의자들이 가지는 인공지능에 대한 새로운 열광은 왜 더 우려스러운 방향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가?
  • A3) 불이 인류를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드라마틱하게 바꾼 것처럼, 인공지능은 우리 삶을 극적으로 바꿀 것이다. 기술낙관주의를 가진 소수의 지배층이 담론을 이끄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되는 방향은 아니다. 이 현대판 과두 귀족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장. 운하의 비전

수에즈 운하 건설에서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증기선이 제때 출현했고, 이집트 노동자들이 나쁜 여건 속에서도 일을 열심히 했고, 노동력이 부족해졌을 때 준설 기계가 잘 쓰였으며, 재정 문제가 생길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거둔 괄목할 만한 성공은 동일한 개념을 파나마에서 적용하려고 했을 때 발생한 대대적인 실패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그는 수만 명의 투자자와 엔지니어를 설득해 파나마에서도 관문 없이 해수면 높이의 운하를 짓는다는 비현실적인 기획에 투자하게 했고, 이는 2만 명 이상이 말라리아와 황열병 등으로 사망하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재정적인 재앙에 빠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것은 그 어떤 테크놀로지의 역사에도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사례다. 거대한 재앙은 기술낙관주의로 생긴 강력한 비전에 뿌리가 있는 경우가 많고, 그 비전은 과거에 성공에 뿌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3장. 설득 권력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마치 레셉스가 가졌던 것처럼) 설득 권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엘바 섬에서 탈출했던 나폴레옹, 금융위기에 빠진 월가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설득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경제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비해 설득 권력은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설득 권력은 아이디어와 의제 설정 능력에서 얻을 수 있다. 아이디어는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경쟁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드러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의제를 설정하는 것은 소수의 선택들을 한정하는 것으로 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의 성공,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하고 사람들의 과잉 모방으로 강화된다. 설득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 있기에, 커다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질 것이라 기대하면 안된다. 길항 권력 및 더 폭넓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과잉 확신에 찬 이기적인 비전의 고삐를 잡을 수 있다.

4장. 비참함의 육성

르네상스 이전 암흑기라 불리던 중세 유럽에서도 많은 기술 진보가 있었으나, 생산 잉여는 대부분 소수에게 돌아갔고, 다수는 오랜 시간 비참한 삶을 유지했다. 농업 기술(쟁기, 수차 등) 진보를 통한 생산 잉여는 화려한 건축물을 만들고 부를 향유하는 종교 교단에 돌아갔다. 미국 조면기 발명(1793)은 면화 생산을 폭증시켜 남부를 부유하게 했지만, 대농장 확장과 노예 수요 증가로 노예제도의 가혹함을 연장하고 강화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기술의 방향이 권력 구조에 좌우되며, 권력자들이 잉여를 노동 통제와 자신의 부 축적에만 쓰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권력 구조가 노동자 권리나 길항 세력을 억누르면 진보 없는 성장이 지속되므로, 기술 그 자체보다 제도적 투쟁과 길항 권력을 통해 공유된 번영을 향하는 식으로 기술을 재설계해야 한다.

5장. 중간 정도의 혁명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제적 전환인 산업혁명을 재해석한다. 산업혁명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저술이 나와 있지만, 계층 상승을 꿈꾸게 된 새로운 중간 계층, 기업인/사업가 사이에 공유되었던 비전은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중간계층의 열망은 16세기와 17세기부터 잉글랜드에서 ‘중간 정도’ 계층 출신인 사람들에게 영향력과 권한을 강화해 주기 시작한 제도적 변화, 특히 17세기 후반 명예혁명 이후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자 했던 중간층 사람들의 야망에 의해 산업혁명이 추동되긴 했어도, 그들 또한 노동자를 배제하고 이익을 상류·중간 계층에 집중시켰기에 ‘포용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는 설득 권력으로 엘리트와 정치인을 설득해 제도를 바꾼 결과였다.

6장. 진보의 피해자

산업혁명 초기에는 불평등한 기술 이익 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궁핍해지고 힘들 삶을 보냈다. 기술 발전이 노동의 보완재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대체재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와 시민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요구하며 달라지게 된다. 19세기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과 노조 결성, 미국의 노동조합과 진보주의 개혁이 새로운 중간 계층의 배타적 비전에 맞서 노동자를 정치·경제적으로 강화시켰고, 이는 공공 서비스 확대, 노동법 제정, 민주화 압력을 통해 생산성 향상의 과실을 다수에게 분배하는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것은 공유된 번영의 작은 승리였을 뿐이고 그 이후로도 서고 국가들은 공유된 번영을 달성하기 위해 테크놀로지와 제도의 배열을 둘러싸고 기나긴 투쟁의 경로를 가게 된다.

7장. 투쟁으로 점철된 경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가 경험한 유례없는 경제 성장과 공유된 번영은 기술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대공황과 1,2차 대전을 거치며 노동조합이 강화되고,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하면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힘의 균형(길항 권력)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이 시기의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자동화’에만 머물지 않고, 노동자의 한계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업무를 대거 창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기술의 진보 방향과 이를 분배하는 사회적 제도가 모두 다수의 노동자에게 유리하도록 지속적인 ‘투쟁’을 거쳤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8장. 디지털 피해

197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역전된다. 프리드먼식의 ‘주주 가치 극대화’ 이념이 경영계를 지배하고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노동조합이 무력화되면서, 기술의 방향은 철저히 기업의 비용 절감과 노동자 통제로 선회했다. 특히 IT 기술과 소프트웨어 혁명은 새로운 업무를 창출하여 노동자를 보완하기보다는 중산층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자동화’에 집중되었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은 작업장 내 광범위한 데이터 수집과 감시 알고리즘을 가능하게 만들어,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파놉티콘’을 현대 직장에 구현해 냈다. 그 결과, 눈부신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정체되었고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술의 방향성을 통제할 길항 권력이 무너지자, 디지털 기술은 소수 엘리트의 부와 통제력을 불려주는 반면 다수에게는 커다란 ‘피해’를 입히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9장. 인공 투쟁

오늘날 인공지능(AI) 열풍은 과거의 맹목적인 기술 낙관주의를 답습하여 우려스러운 방향을 향하고 있다. 테크 기업들은 인간의 지능을 완전히 대체하는 ‘일반인공지능(AGI)’이라는 환상에 집착하며, 대규모 데이터 수집을 통한 사회적·경제적 감시망 구축과 인간의 노동을 밀어내는 데에만 몰두한다. 문제는 현재의 AI 기술이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지도 못하면서 일자리만 뺏고 노동자를 통제하는 ‘그저 그런 자동화(so-so automation)’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기계가 인간을 보완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기계 유용성(Machine Usefulness, 인간의 노동활동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기술 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빅테크 기업의 편협한 비전에 종속되어 노동자를 배제하고 감시하는 불필요한 ‘인공적인 투쟁’을 굳이 벌이고 있는 셈이다.

10장. 민주주의, 무너지다

초기 인터넷 개척자들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정보의 민주화를 이끌 것이라는 기술 낙관주의적 비전을 품었으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디지털 기술과 AI는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사회를 지탱하는 정치적 기반인 민주주의마저 위협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관심을 뺐고 데이터를 수집해 거대한 광고 수익을 올리는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알고리즘을 통해 분노와 극단주의, 가짜 뉴스를 의도적으로 증폭시키고, 사람들을 필터 버블 안에 가둔다. 이는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람들이 연대하여 길항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토대인 ‘진실에 대한 공유된 이해’를 파괴한다. 즉, 민주주의의 핵심 작동 기제인 ‘공론장’의 기능을 디지털 플랫폼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권위주의 국가들은 AI를 활용해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시민 감시 체제를 구축하고 정치적 무기로 이용하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로 친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기술의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11장.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기

공유된 번영을 회복하려면 방치된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맹목적인 기술 낙관론에서 벗어나 사회적 담론을 재구성하고,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할 21세기형 길항 권력을 재구축해야 한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자본(자동화)에 유리하고 노동에 불리하게 설계된 현재의 조세 제도를 개편하여 ‘인간을 보완하는 기술(기술 유용성)’에 대한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나아가 거대 테크 기업의 독점을 해소하고, 데이터 수집과 AI 활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테크놀로지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자율적으로 굴러가는 기차가 아니며, 우리가 어떤 제도를 선택하고 어떻게 연대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재설계될 수 있다.

11장 좀 더 자세히.

11.1. 테크놀로지 변화의 방향을 다시 잡기

테크놀로지의 발전 방향은 자연법칙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며, 사회적 합의와 정책을 통해 의도적으로 바꿀 수 있다.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태양광, 풍력)의 발전이 좋은 사례다. 과거에는 화석연료 기술 투자가 주류였지만, 사회적 요구,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보조금 지급, 탄소 배출 규제 등이 합쳐지면서 기술 발전의 궤도가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완전히 틀어진 걸 보면, AI와 디지털 기술도 이처럼 올바른 방향으로 틀 수 있다.

11.2.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재구성

단순히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인간의 ‘대체재’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는 ‘보완재’로서 기능하도록, 즉 기계 유용성(Machine Usefulness)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재설계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작업을 창출하고 노동자가 더 높은 가치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육 분야에서 교사를 화면 속 AI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주면 학생들에게 맞춤형 개별 지도(인간적인 상호작용)를 할 수 있게 돕는 기술을 만드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11.3. 길항 권력을 다시 일구기

올바른 방향 전환은 정책가나 테크 기업의 선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에, 거대 자본과 테크 엘리트들의 비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길항 권력이 필수적이다. 단순히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는 과거의 노조를 넘어, 작업장 내 기술 도입 방식과 데이터 감시 문제에 대해 노동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대적인 노동조합, 그리고 시민사회 단체와의 폭넓은 연대가 필요하다.

11.4. 테크놀로지의 방향을 다시 잡기 위한 정책들

정부가 시장의 유인 구조를 바꿔 기업들이 ‘인간을 보완하는 기술’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보완적 정책의 사례는:

  • 노동자 친화적 기술에 대한 보조금과 지원: 기술이 노동자 감시와 모니터링에 사용되거나, 기술로 얻어진 부가가치가 노동자에게 가는 몫이 주는 건 독려하면 안됨. 인간을 보완하는 방향에 대한 연구개발은 보조.
  • 거대 테크 기업 분할: 높은 시장집중화가 혁신의 방향을 왜곡할 수 있음. 분할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분할을 통해 테크놀로지 방향을 자동화, 감시, 데이터 수집, 디지털 광고로부터 멀어지도록 돌린다는 근본 목적을 염두한 보완책임.
  • 조세 개혁: 기업이 사람을 고용하면 높은 세금(급여세 등)을 내고, 기계나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면 각종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 비대칭적인 세금 제도가 ‘불필요한 자동화’를 부추기고 있으므로, 자본과 노동에 부과하는 세율의 균형을 맞춰야 함.
  • 노동자 교육훈련: 기업이 노동자 교육훈련에 투자하는 건 (교육 훈련으로 배우는 내용이 다른 기업에서도 쓸 수 있을 범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음. 정부정책으로 도움이 필요할 수 있음.
  • 데이터 보호/소유권 제도: 개인 정보는 보호받아야 하는 데이터일 뿐 아니라, 플랫폼 내의 유사 집단의 정보를 제공해 광고나 제품에 활용하는 ‘외부성’을 가지고 있음. 데이터 소유권을 사용자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고려해야 함.
  • 통신품위법230조의 철폐: 플랫폼에 올라온 컨텐츠에 대한 법적 행동이나 규제로부터 플랫폼 사업자를 보호하는 조항인 통신품위법230조는 컨텐츠가 잘못되었거나 심지어 혐오적인 경우에도 플랫폼에게 면죄부를 준다. 철폐해야함.
  • 디지털 광고세: 소비자가 몰랐던 제품이나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광고가 가치있을 수 있지만, “군비경쟁”적 요소가 있어 소모적인 디지털 광고에 대한 제약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함.

11.5. 그 밖의 유용한 정책들

직접적으로 테크놀로지 방향을 바꾸지는 않지만, 막대한 불평등과 기업의 과도한 정치적 권력을 제한하는 목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 정책들에는 부유세, 재분배와 사회안전망 강화, 교육, 법적최저임금제 등이 있고, 학계가 테크 기업으로부터의 막대한 지원금에서 독립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11.6. 테크놀로지의 경로는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 HIV/AIDS환자들은 질병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해자라 믿었으나, 90년대에는 내러티브가 바뀌기 시작하고, 활동가들이 조직화되었고, 의료정책의 방향이 바뀌었고, 지금은 HIV바이러스의 확산을 통제하고 치료하는 방식이 많이 나왔다. 에이즈도, 재생에너지도, 어쩔수 없는 거라 생각했던 것임에도 빠른 발전이 이뤄졌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경로도 그럴 수 있다.


내 생각: 주 메시지는 테크놀로지의 방향이 알아서 잘 거라 기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잘 정해야 한다는 거다. 그거에 비해 너무 설명이 방대하다….

내 생각2: 저자들은 노동자가 노동을 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높게 잡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기본소득은 11장 말에 짧게 언급하였고,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도 그럴게,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기술발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기본소득은 ‘모두가 일을 안해도 되는 상태’를 디폴트로 깔고 있으니 주장과 부합하는 방향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한 더 깊은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가, 그것까지 있으면 1000페이지 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닿으니) 여기서 그만.